민수기 40년 기록이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20장부터 광야 후반기의 기록입니다.
40년의 기록이 이렇게 간략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죽음과 제사장과 레위인과 붉음 암송아지의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음 광야에서 죽는다고 하셨지만 속죄를 통해 사는 길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본문에서는 아론에게 단독으로 말씀하십니다.
아론은 이스라엘의 반역으로 죽을 위기에 향로를 들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서서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론에게 성소에 대한 죄와 제사장의 직분에 대한 죄를 담당하라고 하십니다.
성소에 대한 죄는 이스라엘의 백성의 반역의 죄요, 제사장의 직분에 대한 죄는 제사장직을 반역하는 죄입니다.
성소로 인해 진멸을 당한다면 성소가 있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소가 없던 애굽 시절로 돌아가면 안 죽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애굽 시절은 구원과 생명도 없고 인생의 의미도 없고 정체성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소를 세워주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희망과 축복과 거룩함에 동참하는 천국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거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범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언약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아론을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이 살도록 하셨습니다.
제사장 직분은 이스라엘의 백성의 죽음을 짊어지는 극한 직업입니다.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려고 사선으로 나아갔으니 말입니다.
이런 아론에게 동역자를 주셨습니다.
레위인을 성막의 동역자들로 세우셨습니다.
레위인이 성소의 가까이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까이하면 레위인과 제사장도 죽습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이 죽으면 이스라엘도 다 죽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직분을 감당해야 이스라엘이 다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레위인을 선물로 주셨고 제사장 직분도 선물로 주셨습니다.
속죄를 감당하는 것은 무겁고 고된 직분인데 하나님은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원래 아론은 금송아지 사건 때 주축이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지 않고 살았고 용서받았고 계속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광야는 형벌과 죽음의 장소인 것 같은데 사실은 생명의 장소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장소입니다.
성소가 있고 제사장이 있고 레위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일대일 목자의 삶은 사람을 감당하는 고된 삶입니다.
사람은 섬기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가까이 가서 오랜 세월을 함께하면서 감당하다 보면 얼마나 죄가 많고 얼마나 가시가 가득해서 사람을 상처 주고 고통스럽게 하는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직분이 선물입니다.
사람을 감당하여 살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닌데 하나님이 우리를 복음의 동역자로 세우셨습니다.
사람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배우고 인격이 성장하고 내가 섬기는 한 사람이 변화되고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죽음이 가득한 세상에 양들의 죄를 감당하고 살리는 목자가 있음이 하나님의 희망이고 세상의 희망입니다.
그다음은 제사장에게 주는 음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람의 경우는 대속금을 대신했습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의 초태생, 거제로 드리는 헌물도 제사장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이유는 속죄를 감당하는 직분이 너무나 귀하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없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다 죽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보답으로 드리는 것이 맞습니다.
죄를 담당하는 직분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시고 먹이고 살리시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제사장은 날마다 속죄를 위해 죽음의 자리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죽음 앞에 나아가는 위험한 직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갚아주십니다.
제사장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풍요를 누리니 하나님이 제사장들도 풍요롭게 하십니다.
회막에 고된 봉사의 직분을 감당하는 레위인도 먹여주십니다.
레위인도 기업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거제의 십분의 일이 레위인의 양식입니다.
레위인도 받은 십일조 중의 십일조를 드리게 하십니다.
그것이 타작마당의 곡물과 포도즙 틀의 소출 같게 하십니다.
이것은 풍성한 열매를 맺는 축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땅이 없지만 하나님이 타작마당의 곡물과 포도즙 틀의 소출처럼 풍성한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보상으로 주십니다. 축제의 기쁨으로 갚아주십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삶은 세상의 경제 가치로 보면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죄를 감당해서 그들이 죽지 않게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죽으면 일을 할 수도 없고 열매도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그들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풍요롭게 하셔서 기쁨을 주셔서 그들이 기쁨으로 직분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교회에서도 전임 사역자가 즐겁고 행복해야 말씀을 주고 양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임 사역자가 먹고사는 것 때문에 근심이 가득하다면 어떻게 말씀을 풍성하게 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이 성전에서 나는 것으로 풍성이 먹고사는 것처럼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이 복음으로 먹고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의 사역자가 잘 먹고 잘 사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동참하고자 하기 때문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전임 사역자가 돕는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신이 나서 많은 경제 가치를 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사역자를 복음으로 풍요롭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19장은 광야의 하일라이트입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재 이야기입니다.
진영 밖에 붉은 암송아지의 재로 이스라엘의 부정을 씻는 정결한 물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광야는 많은 사람이 죽는 곳입니다.
최소한 60만 명이 40년 동안 죽었습니다.
고라의 반역과 염병으로 많이 죽었습니다.
사람의 시체를 만지면 이틀 동안 부정하다고 하셨는데 광야 40년 동안 계속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붉은 암송아지의 잿물로 정결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정결함을 입지 않으면 언약에서 끊어집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재는 부정한 자의 죄를 정결하게 하여 속죄의 능력 거룩의 능력입니다.
제사장의 속죄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많은 부정한 죄를 어떻게 그 많은 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코로나가 범람해서 병상이 모자란 경우와 같습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재는 제사장이 아닌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정결하게 하는 물을 뿌리면 이스라엘이 정결하게 되어 죽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을 뿌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집니다.
이 의미가 무엇입니까?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이 결코 망하지 않기를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죽음이 가득한 광야에 정결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고 무섭게 말씀하셨지만 여전히 성소가 있고 형벌 속에 방치하지 않고 정결함을 회복해서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죽는다 죽인다 하시면서 한편으로는 사는 길을 마련하십니다.
다 죽인다 하면서 모세를 통해서 나 좀 말려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중 플레이를 하십니다. ㅋㅋ
제사장과 레위인을 통한 속죄와 붉음 암송아지의 재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살기 원하십니다.
살아라!
붉은 암송아지의 희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붉은 색은 피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불에 살라져서 재가 됩니다.
송아지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죄가 없는데 내가 왜 이스라엘을 위해 죽어야 합니까 할 것입니다.
암송아지의 죽음이 없다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죽습니다.
암송아지가 자신을 불태워 재가 되어 이스라엘을 살립니다.
얼마나 고맙고 거룩한 희생입니까!
이스라엘이 그 잿물을 뿌려 정결함을 입을 때마다 암송아지의 희생에 고맙고 미안해할 것입니다.
양심이 있다면....
나 때문에 죽음 암송아지로 인해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 희생을 안다면 함부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양심이 있다면....
라이언 일병은 다른 사람들이 대신 죽은 것을 알았기에 죽은 사람들의 삶의 몫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고백하듯이 말입니다.
헛되게 살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 자기 몸을 불살라 재가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냐고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붉은 암송아지가 정결하게 했다면 원형이신 예수님의 그 피는 우리에게 양심을 정결하게 하고 죽음에서 벗어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죽음이 가득한 광야에서 붉은 암송아지의 희생을 통해 이스라엘이 죽지 않고 살게 하셨습니다.
죽음의 부정함을 깨끗하게 씻는 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을 덮는 희생의 죽음이요 모든 죄를 씻는 정결의 능력입니다.
그 피가 뿌려지는 곳마다 더러움이 사라지고 죽음이 떠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나누게 하고 천국의 삶을 살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상처받았고 고통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살리기 위해 붉은 암송아지를 희생하셨습니다.
원망과 반역은 사람이 했는데 붉은 암송아지가 죽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생자를 주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고생하십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고통하시고 그의 아들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광야는 이스라엘이 고생한 장소가 아니고 하나님이 고생하신 장소입니다.
우리도 광야 같은 세상에서 고난이 있지만 하나님은 사랑하시느라 더 고생하십니다.
왜 택해서 고생하시는가!
고난 받는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더 고난 받기 때문이십니다.
자녀가 아무리 부모를 괴롭히고 원수 노릇을 해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식을 힘들어하기는 하나 사랑이 식거나 줄어들기 어렵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식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식지 않습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희생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나를 위해 형벌로 인해 불에 타서 죽은 예수님의 희생 속에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나의 속죄와 거룩함과 깨끗함이 약속되었습니다.
그 피를 바르고 뿌리고 그 피에 잠겨서 우리가 생명을 얻어 살기를 기도합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나가는데 예수님의 희생과 죽음에 덮여서 이 기간을 지나가기를 기도합니다.
민수기의 40년이 암송아지의 죽음으로 덮여 지나간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죽음에 덮여 인생의 광야를 지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이 나에게 읽어주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수기 21장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2022년 2월 27일 (0) | 2022.02.27 |
---|---|
민수기 20장 그 거룩함을 나타내셨더라 2022년 2월 20일 (0) | 2022.02.20 |
민수기 16장 17장 아론의 지팡이에 싹을 내신 하나님 (0) | 2022.02.06 |
민수기 15장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2022년 1월 30일 (0) | 2022.01.30 |
민수기 13장 14장 열두 수령들의 정탐 보고 2022년 1월 23일 (0) | 2022.01.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