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감정을 부렸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결정적인 실패의 이야기입니다.
이 실패를 통해서 본문이 어떤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일까요?
모세처럼 실패하지 말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는 이야기일까요?
그렇게 단편적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나타내지 못한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20장 1절은 출애굽 후 40년이 되는 첫째 달입니다.
광야 39년의 세월이 벌써 지났습니다.
신기한 것은 출애굽 직후에 머물렀던 신광야입니다.
광야를 돌고 돌아서 40년 전의 장소로 돌아왔습니다.
달라진 것은 1세대들이 거의 죽고 미리암도 죽어 이곳에서 장사 지냈습니다.
모세를 살렸던 미리암, 홍해의 기적의 날 소고 치고 춤추던 위대한 여성 지도자가 퇴장합니다.
이렇게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교체되지 않는 모습이 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입니다.
물이 없자 회중들이 1세대처럼 동일하게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파종할 곳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석류도 없고.... 없고... 없고....
광야에서 형제들이 죽을 때 같이 죽었으면 좋았겠다 불평합니다.
지도자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1세대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모세와 싸우며 돌을 집으려고 했습니다.
2세대도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이쯤 되면 광야 40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세의 마음에 절망이 밀려들었을 것입니다.
내가 뭐 하는 거지,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망에 대해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들의 죄를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이 40년 전과 비슷합니다.
데자뷔 같습니다.
한 가지만 다릅니다.
40년 전에는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를 가지고 치라고 하셨으나 이번에는 지팡이를 치라고 하지 않고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십니다.
그런데 그 차이에서 모세와 아론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모세가 그 명령대로 지팡이를 잡습니다.
여기까지는 잘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에 모으고 하나님이 주지 않으신 험악한 말을 합니다.
40년 동안 참은 분노가 터진듯한 말을 합니다.
반역한 너희여!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짜증과 신경질과 사나움이 느껴집니다.
반석에게 명하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그 지팡이를 잡고 지팡이로 두 번 쳤습니다.
아주 세게 쳤겠지요!
그동안 쌓였던 것이 지팡이 두 번에 실렸을 것입니다.
그의 손으로 그의 지팡이로 우리가 물을 내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생각과 감정대로 행했음을 보여줍니다.
40년 전에도 치라고 했으니 이번에도 치라고 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주의 깊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인지, 쌓인 것이 너무나 화가 나서 친 것인지.
신기한 것은 말씀대로 하지 않았는데도 물을 많이 주셨습니다.
모세가 명백히 잘못했음에도 목마른 백성을 위해 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인간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고 용서하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모세와 아론의 잘못을 하나님이 짚으십니다.
너희가 나의 목전에서 나를 믿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하시며 모세와 아론을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모세의 잘못을 나무라신 적이 없었습니다.
늘 모세의 편이셨고,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모세를 특별한 친구라 옹호하셨고 지면에서 가장 온유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믿었다면 반역한 너희여 너희를 위하여 우리가 물을 내랴 하지 않았을 거이고, 지팡이로 두 번 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을 믿고 지팡이를 두 번 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원망 불평하고 반역하는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하나님을 믿었고 중보자 역할을 충분히 감당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붙들고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을 말리고 중보했습니다.
40년만에 딱 한 번 쌓인 화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세에게 퇴장 카드를 내미십니다.
좀 너무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팡이 두 번 쳤다고 이렇게 하시는 것인가?
모세의 심정이 민수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시키고 광야 40년을 이 백성 때문에 많은 고난을 견딜 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에 좌절이 컸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하신 것 아닌가, 사람을 친 것도 아니고 반석을 쳤는데.
모세의 침묵 속에는 그의 절망과 슬픔이 담겨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에 보면 훗날(일 년도 안 된 훗날) 모세는 감추어진 심경을 말합니다.
그때에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을 보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한 번만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로 매달렸습니다.
그 땅에 들어가 그 아름다운 모습을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에는 냉담하셨습니다.
그만해라 더이상 말하지 마라 하셨습니다.
그게 그렇게 힘든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이상할 정도로 모세의 소원을 거절하셨습니다.
다시 민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거룩함을 나타내셨습니다.
거룩함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추측해보면, 첫째로는 40년 동안 달라지지 않는 백성들을 위해 물을 주셨고 그들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신 점입니다.
이스라엘은 전혀 소망이 없고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중보자 모세마저 마지막에 지팡이를 쳤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을 주셨고 다른 지도자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가 넘침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바뀌지 않는 하나님의 신기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한두 번만 실망을 줘도 돌아서고 화가 나면 지팡이를 들고 두 번 아니라 여러 번 때릴 것입니다.
둘째 모세를 그 땅에 못 들어가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일까...
어쩌다가 모세가 실수한 것이 아니고 그 속의 죄성이 나타난 것입니다.
모세도 원래 그렇게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 번의 실수 속에는 그 속에 얼마나 감정과 혈기가 가득한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역사에 합당하지 않은 죄인입니다.
그가 출애굽의 지도자로 합당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쓰인 것입니다.
그가 특정한 죄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합당하지 않은 죄인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의미가 아닌가 합니다.
신명기에 가보면 모세가 놀랍게도 민수기에 없는 말을 세 번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다고 말합니다.
너희 때문에 진노하사 내 말을 안 들으시고 그만해라 하셨다고 합니다.
너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내가 요단을 건너지 못하게 하리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결국 너희 때문에 내가 못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민수기에는 네가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해서 하나님이 못 들어가게 하셨다고 하는데 말이죠.
모세가 이스라엘 핑계 대는 것일까요?
민수기 사건 속에는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어떤 소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지팡이를 휘둘러서 못 들어가는 것 같지만 모세는 이스라엘의 속죄를 광야에서 담당하는 중보자입니다.
40년 동안 백성을 위해 중보자로서 속죄를 담당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 때는 내가 심판을 받아서라도 이 백성을 용서해달라고 합니다.
모세가 못 들어가는 것은 백성의 죄를 담당하는 속죄의 의미가 있습니다.
너희의 죄를 지고 내가 속죄양으로 이곳에 남는다 그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원래는 백성들이 다 죽고 모세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못 들어가고 백성은 들어갑니다.
마치 십자가의 죄를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 죽으신 예수님처럼 모세는 광야에 남아 고난을 감당합니다.
넷째. 진정한 소망이 무엇인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진짜 소망인가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소망인가요?
사사기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백성들은 온갖 죄를 짓습니다.
가나안 땅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언약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 더 축복입니다.
모세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징계와 같지만 하나님이 그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모세는 상 주심을 소망했습니다.
그가 바란 상이 가나안 땅이 들어가는 것입니까?
모세가 여호수아를 뒤에 두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복전쟁을 하고 땅 분배를 하는 것이 모세에게 좋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위해 도리어 퇴장시키십니다.
이것이 그에게 가장 좋은 계획인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16년 연장된 삶을 살았지만 그 15년의 삶은 좋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위대한 지도자로 쓰셨고 위대한 지도자로 떠나 위대한 지도자로 남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심으로 위대한 지도자로 남게 하신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은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모세의 시체를 두고 미가엘 천사장이 사탄과 다툽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피라미드에 묻힐 수도 있고 가나안 땅에 막벨라 굴에 묻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죽어서 무덤을 못 찾습니다.
그러나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를 지켰습니다.
모세는 세상 영광을 얻지 못했지만 그리스도의 고난 가운에 나타났습니다.
모세는 그 땅에 못 들어가지만 끝까지 지도자의 직분을 감당합니다.
그리고 아론의 죽음으로 제사장 직분을 인계합니다.
아론도 원래 금송아지 사건 때문에 죽어야 했지만, 이렇게 영광스러운 인계로 그의 죽음도 영광스러웠습니다.
은퇴와 인계는 계승할 사람이 있고 시원스럽게 은퇴한 점에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모세는 사납고 거친 사람인데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기까지 하나님이 키우시고 쓰셨습니다.
40년 동안 한 번 휘두른 모세를 실패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약함을 가진 인간이요 죄인이라는 점에서 위로가 됩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신 점에서 우리에게 희망이 됩니다.
모세의 실패와 가나안에 못 들어간 점을 통해 진정한 소망은 천국이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진정한 소망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이 참된 축복입니다.
자격 없는 죄인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축복을 주시고 참된 소망인 천국을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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