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5장은 원망과 불평과 불신의 이야기와 다른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헌신과 속죄 제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6장 반역의 사건인데, 두 반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간 광야 생활을 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할 헌신과 속죄제를 말씀하심으로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망과 사랑의 말씀이 우리를 위로해주시고 절망의 상황에서 일어나서 믿음의 훈련을 받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15장은 14장과 많이 다릅니다.
가나안 땅에 너희가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세대들은 과연 2세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을지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들어가 살게 될 것이라고 불안과 두려움을 확신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위로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40장에 이사야 선지자가 바벨론 포로가 될 백성들을 향해서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범죄한 백성들을 징계하시지만 타이르시고 말로 위로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데스 바네아 보고 때 무섭게 화를 내셨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광야 40년은 미워서 버린 사건이 아니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훈련하시는 기간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그 땅에 들어갈 약속이 취소된 것이 아닙니다.
그 땅에 들어가서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드리는 자발적인 제물입니다.
방금 전에는 다 죽이겠다고 하셨지만 감사제와 헌신의 제물을 기쁨으로 나에게 달라고 하십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마치 어젯밤에 부부가 심하게 싸워서 이혼하자고 하더니 그다음 날 아침에 우리 결혼기념일에 아웃백 가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그 땅으로 데려가 향기 나는 백성으로 삼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말씀하십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치료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징계의 회초리로 때리셨지만 절망과 슬픔으로 울고 있는 백성들에게 장래에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위로의 말씀을 주십니다.
소나 양으로 드릴 때 고운 가루, 기름과 포도주로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포도주나 고운 가루, 기름은 광야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장차 곡식과 기름과 포도주로 예물로 드릴 때가 올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향기로운 제물을 드리도록 하십니다.
광야에서 이 백성들은 향기가 나지 않는 백성들입니다.
도리어 쨔증나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향기는 용서와 사랑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헌신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향기 나는 백성들로 만드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반역한 죄인들을 위해 주심으로 완악하고 악한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향기 나는 백성이 될 것을 바라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망이요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타국인도 본문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죽이셨다면 어떤 타국인이 하나님을 섬기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용서하셔서 향기로운 백성들로 삼으니까 타국인도 이 하나님을 섬기고 싶다고 해서 타국인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국인도 환영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말씀을 따르면 향기 나는 백성이 됩니다.
그 사랑을 안 받고 살면 자기만 손해가 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고 하나님은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의 초청은 활짝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우리는 향기 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패하고 악한 자들입니다.
목마름과 이기심으로 방황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정결하게 되고 아름다운 향기로운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헌신하지 ㅁ라라고 해도 헌신하게 됩니다.
인색함이 떠나가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릴수록 더 행복해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헌신하면 내가 쓸 것을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니 가난해질 것 같은데 헌신은 향기입니다.
하나님이 헌신적인 분이시기 대문에 헌신을 하면 하나님과 마음이 통합니다.
헌신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헌신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헌신할 것을 주시고 믿음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인도하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의 양식을 먹을 때에 거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거제는 하나님께 들어서 올려드리는 제사입니다.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떡을 들어서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주신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얻은 열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비를 주지 않으시고 건강을 주지 않으시면 얻을 수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면 하나님이 다시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것을 빼앗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더 환급하셔서 더 주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삶의 축복은 하나님과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주셨고 감사해서 돌려드리면 하나님이 더 주십니다.
사람 사이에도 선물을 주고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주고 안 받거나 주고받는 것은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오갑니다.
선물 안에 사랑이 전달되고 마음이 전달돼서 사랑의 관계가 깊어집니다.
주고받으며 사랑이 풍성해집니다.
가나안 땅이 풍성한 것은 사랑이 풍성해지는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주고받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줄수록 더 행복하고 더 풍성해집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삶은 손해가 아닙니다.
드릴수록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더 많이 주십니다.
우리 모임이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서로 주고받으면 우리 모임 안에 사랑이 흐르고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속죄의 규례가 나옵니다.
제사장이 온 회중을 위해 속죄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부지 중에 지은 죄는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약함을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한 사람의 죄와 회중의 죄의 속죄의 크기가 다릅니다.
속죄는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부지 중에라도 말씀을 어긴 것은 하나님에게 상처들 드린 것입니다.
14장의 반역은 부지 중의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를 들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는 말로 쉽게 된 것이 아니라 속죄 제물의 희생을 통해 된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상처와 아픔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때 쿨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아픔을 견디는 것입니다.
용서는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과 상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실 때 그 고통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멸시받으시고 고통을 당하신 하나님이 제물에게 벌을 주시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 때문에 죄 없는 제물이 죽습니까?
그 제물은 사실 억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희생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아들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면서 담긴 그 고토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변호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적어도 3번 진멸을 당할 뻔했습니다.
금송아지 사건, 가데스 바네아 사건, 고라의 사건 등.
그런데도 하나님은 용서하셨습니다.
인간의 죄악과 교만으로 인한 고통도 하나님은 참으셨습니다.
택하신 백성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변하지 않으셨고 그 사랑의 온도가 식지 않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속죄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속죄의 길이 열린 것은 용서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면 용서도 가능합니다.
용서를 받지 못한 고통이지만 용서하는 것도 고통입니다.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를 하다가 붙잡혔고 하나님이 그를 죽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나무를 하는 것이 돌 맞아 죽을 일인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사랑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고의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하나님은 안식을 만드셨고 창조의 완성이고 창조의 목적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도 안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안식은 하나님을 만나 예배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창조 주권과 구원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안식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안식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 영혼이 불안하고 두려움에 빠져 안식이 없습니다.
진정한 안식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뤄집니다.
청색 끈과 옷단술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이는 여호와의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방종하지 않게 하는 제어의 표식입니다.
뭔가 치렁치렁 달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를 하고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방종하게 살면 안 된다는 표식입니다.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표식입니다.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세 번 반복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을 부정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는 것을 수차례 반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기 어려웠으나 구원과 사랑을 취소하지 않으셨고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정에서 이혼하려는 한 사람에 반하여 그 가정을 지키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광야의 징계는 버리는 것이 아니라 회복하고자 하는 손길입니다.
하나님은 무섭게 말씀하셨지만 광야에서 잊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잊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광야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십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내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그 사랑을 믿고 잘 따라오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하나님의 상처받으신 고통이 있습니다.
광야 훈련 마지막에도 음행이 나옵니다.
민수기는 비참한 실패 이야기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하시고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랑의 양속을 지키셨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지만 그곳에서도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눈먼 바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시는가 바보 아닌가.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고통을 감당하시는 사랑, 독생자 예수님의 피가 모든 반역을 덮고 순결한 새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바보 같은 사랑을 믿고 바라보고 누리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헌신하는 향기로운 백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한 사람을 사랑하는 아픔을 감당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람의 죄성에 부딪치고 사랑하는 고통을 감당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런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성경이 나에게 읽어주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수기 18장 민수기 19장 붉은 암송아지의 재 2022년 2월 13일 (0) | 2022.02.13 |
---|---|
민수기 16장 17장 아론의 지팡이에 싹을 내신 하나님 (0) | 2022.02.06 |
민수기 13장 14장 열두 수령들의 정탐 보고 2022년 1월 23일 (0) | 2022.01.23 |
누가복음 6장 열둘을 택하신 하나님 (0) | 2022.01.16 |
출애굽기 17장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0) | 2022.01.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