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열두 사도를 부르신 사건은 세계 구원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세계 구원은 한 사람을 돕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한 손 마른 사람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신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다가 이삭을 잘라먹다가 예수님은 다윗의 예를 들어 제자들의 무죄를 변호하셨습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오른손 마른 사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보실 때 도움이 필요한 사람, 생명을 구원해야 할 사람으로 보셨습니다.
그는 오른손 마른 것으로 인해 슬픔이 많고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당시는 장애를 형벌로 여기고 하나님의 백성의 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구약의 예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아픔을 깊이 공감하시고 그의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프고 슬픈 인생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만의 약함이 있고, 다른 사람이 도울 수 없는 상처가 있습니다.
가정의 슬픈 사연이나 질병이나 사고로 고통을 안고 살기도 합니다.
오른손 마른 사람처럼 자기만의 슬픈 핸디캡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아픔을 가진 존재로 보십니다.
그래서 아픔과 슬픔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돕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고자 안식일에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세부 규칙을 만들어서 사람을 고치는 일도 안식일에 하지 않고 응급조치만 허용되게끔 하였습니다.
법은 사람의 생명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그들의 관심은 사람의 슬픔이나 아픔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법을 지키는가 안 지키는가 고발할 미끼로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법을 주신 목적은 사람을 돕고 살리고 아픔과 슬픔을 구원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의 슬픔과 아픔에 전혀 공감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을 100번 읽고 암송해도 성경으로 비판하고 정죄할 수도 있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한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고 하셨습니다.
구석으로 데려가시거나 안식일 말고 다른 날 보자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를 통해 한 손 마른 사람과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사람과 다른 사람들을 돕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사랑이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십니다.
어느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일인지 물으셨습니다.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는 것은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라서 고쳐주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고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지금 그를 도와줄 수 있는데 방치하는 것이 악이고 생명을 죽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일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절박한 마음으로 도우셨습니다.
안식일 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은 사람을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쉬게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사람의 슬픔과 고통과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법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고발하고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들어도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면 말씀으로 사람을 이용하고 고발하고 비판합니다.
예수님은 내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내밀기 부끄럽고 약한 손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약함과 슬픔과 무거운 인생의 짐을 주님께 내밀어 맡기기를 원하십니다.
그의 슬픔과 수치와 무거운 짐을 담당하고자 하셨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내손을 내밀라 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보고 싶어 하지 않고 얼굴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슬픔과 아픔을 담당해주고자 하셨습니다.
나에게 아프고 상하고 무거운 질고가 있다면 그것을 예수님은 담당해주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맡아주고자 하시고 그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 내밀자 그 손이 회복되어 건강하게 되어 그로 인한 슬픔과 고통과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났습니다.
밝고 행복한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내밀었을 때 그 질병과 슬픔과 고통을 담당하시고 나음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신 나의 슬픔과 고통과 아픔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밝고 건강한 새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놀라운 사건, 행복한 새 인생을 살게 된 한 사람을 볼 때 감격해야 하는데 종교 지도자들은 도리어 아무런 감동과 기쁨도 없고 도리어 왜 고쳤는가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 걸었을 때 왜 안식일인데 일어나 걸어가냐고 비난한 그들입니다.
이런 반응도 놀랍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의논하였습니다.
안식일 법을 주신 예수님을 도리어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은 체면과 전통과 권위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싸우는 이상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때 산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을 어떻게 살릴지 하나님 앞에서 찾으셨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회의입니다.
밝으매 제자들을 부르사 열두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로서 전권을 받아 파송된 자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가지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대신하는 자들입니다.
곧 예수님의 분신들입니다.
열두 사도 양성 프로젝트는 곱게 죽지 않겠다는 프로젝트입니다.
죽여도 안 죽는 생명 프로젝트입니다.
불사조처럼 살아서 생명의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세우고 키워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예수님의 전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회의하고 얻은 전략입니다.
하나님도 소수의 사람을 불러서 구원의 역사를 하신 것이 창세기부터의 역사입니다.
하나님도 생명의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한 사람을 부르셔서 생명의 역사를 이어오신 것이 하나님의 싸움이었습니다.
작아 보이고 무모해 보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택해서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역사를 이어서 열두 사도를 세우신 것입니다.
열두 지파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룰 사람들입니다.
열둘은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관계성을 맺어서 세울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열둘을 택하신 목적의 첫 번째가 자기와 함께 있고자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사도 인턴을 하게 하지 않으시고 처음부터 사도라 칭하신 것은 예수님의 강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택하심에는 실수가 없고 후회가 없으십니다.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열둘을 부르셨습니다.
다양한 성격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단점도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시기심과 경쟁심이 많아서 엄마까지 데리고 와서 첫째 자리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빌립은 계산을 하고 나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선입견이 강하고 고집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학식이나 재능이 많은 사람을 뽑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기준을 갖고 뽑으신 것인지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그들이 나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따르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선택의 기준은 능력이나 기술이나 재능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 겸손과 배우는 마음이었습니다.
부르심에 나오는 것이 희망이 있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부족해도 말씀 앞에 나온다는 것이 희망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분신으로 키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같은 사람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신 방법으로 키우셨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 하며 경쟁했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키우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을 섬기고 사랑하시느라 어려우셨을 것이지만 한 번도 나가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생명을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다 떠났었으나 부활하시고 예수님은 그들을 또 찾아오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결국 이겼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떠난 후 예수님처럼 한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는 일을 담당하는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소설에 천사가 예수님에게 저 사람들에게 맡기고 와도 되냐고 물었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는 다른 계획이 없다, 저 사람들 말고는...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들을 부르셨고 끝까지 사랑하셨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시몬에게 베드로라고 이름을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사정없이 무너져내려도 요한을 반석 삼겠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끝까지 베드로는 반석으로 삼으셨습니다.
속을 보이지 않는 가룟 유다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자기 길을 갔으나 예수님의 사랑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지려고 하였습니다.
능력이 예수님께로부터 나와 모든 사람을 낫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결국 사람을 향한 사랑이라고 생각됩니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치유의 능력과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이 능력의 원천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사람을 치유할 능력은 없지만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할 능력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한 사람을 향한 사랑에는 고난이 녹아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을 섬기며 고난을 감당하는 것이 결국 전수됩니다.
나만 사람을 감당하는 고통을 당할 수 없다 너도 감당해라 ㅋㅋ
예수님도 요한복음 21장에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잖아요.
왜냐하면 그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닮는 사랑의 목자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열두 사도 양성을 하시며 많은 고통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받은 사랑이 남아서 한 사람을 향한 사랑과 헌신을 하였습니다.
우리도 목자님의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잖아요.
그 사랑을 잊지 못하고 간직하죠.
우리도 이 받은 사랑을 갚을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해야 사랑의 빚이 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사방에 한 손 마른 사람처럼 슬프고 아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관심해서 안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종교 지도자들도 사람의 아픔과 고통에 무관심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도를 부르시고 키우십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불쌍히 여기고 선을 행하고자 하고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리틀 예수님을 키우고자 하십니다.
한 사람을 섬기며 아픔을 겪는 것은 나를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아픈 사람을 더 가까이 가서 위로하면서 하나님을 더 위로하는 것입니다.
올해는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아픔을 겪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한 사람을 섬기면서 고통스러운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고통이요 영광스러운 고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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