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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나에게 읽어주다

누가복음 3장 21절-4장 13절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2022년 4월 3일

by 로카리스 LORD Charis 2022.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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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와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이 잘 나타납니다.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는데 죄로 인해 신분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자녀의 신분을 회복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입니다. 

왜 예수님은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죄인의 자리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하심으로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 세례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죄를 지고 죽음의 세례를 받으려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고 기도하시자 하늘이 열렸습니다. 

인간의 죄가 하늘을 닫았는데 예수님의 순종과 속죄의 죽음으로 닫힌 하늘을 열게 하셨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에게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성령의 이미지가 물처럼 깨끗하게 하고 불처럼 뜨겁게 합니다. 

비둘기 같은 성령은 무엇입니까?

창세기 노아 때 비둘기는 올리브 잎을 물고 돌아온 구원의 전령입니다. 

또 가난한 자들이 소나 양을 드릴 수 없을 때 비둘기를 속죄 제물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비둘기는 심판의 구원과 가난한 자의 속죄를 전하는 성령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성령은 자비와 긍휼의 영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때 예수님께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셨습니다. 

부모에게 아들과 딸 즉 자녀는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럽습니까?

어떤 평범한 또는 못된 사람도 자녀는 부모에게는 소중한 자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여 죄인을 위해 세례를 받으러 죽음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아버지께 순종하기 위해 자기를 낮추어 육신을 입고 육신의 질고와 슬픔을 감당하셨습니다. 

아무리 아들이라도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부모의 슬픔과 고통이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자녀로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이 반역의 길을 갔을 때 얼마나 슬프셨겠습니까?

이사야에는 소도 주인을 알고 나귀도 주인을 아는데 사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슬프다고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슬프십니다. 

마음이 아프고 상처를 겪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의 옳은 대로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하나님께 위로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께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로마서에는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우리 모든 사람의 불순종을 덮습니다. 

순종으로 그동안의 불순종의 상처를 다 덮습니다. 

한 번의 회개로 그동안의 모든 불순종이 덮어집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불의감 속에 괴로워하지 않기 원하시고 의롭다 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일어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의 과거를 묻거나 따지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죄인의 허물도 다 용서하시고 사랑하는 자녀로 다 받아주십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그 순간 지난날의 모든 허물과 죄를 덮어주십니다. 

우리에게 은혜의 복음을 주신 하나님을 감사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둘째 은혜의 복음

예수님은 30세에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청년 시절 인생의 황금기를 드리셨습니다. 

청년 시절 그 꿈과 정열이 넘치는 황금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족부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위로위로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을 통과하여 아담까지 올라가고 그 마지막은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에 생략된 이름도 나옵니다. 

이 족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힙니다. 

그런데 동시에 예수님은 아담의 후손인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인간의 족보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족보에 기록한다면 비슷할 것입니다. 

아담까지 가고 그 위는 하나님입니다.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는 죄 있는 인간일 뿐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난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떨고 있습니다. 

원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아담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의 족보로 오셔서 원래 자리로 우리가 돌아오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영원히 취소가 되지 않습니다. 

잠깐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사람이신 것입니다. 

본질을 바꾸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로 올라가셔도 성부와 성령과 다르십니다.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성부 성령님보다 예수님은 우리와 더 가까우십니다. 

우리의 약함을 더 이해하십니다.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셨고 지금도 우리 몸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슬픔과 아픔과 질고를 모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육신을 입고 아픔과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해주시고 우리의 족보로 오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셋째 마귀의 시험을 이기심

광야에서 마귀에게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성령이 주관하시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시험을 받으시는 이유는 마귀의 시험에 실패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십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죄가 없습니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받으려고 시험받는 자리에 내려오신 것은 시험받는 인생을 깊이 이해하시고 돕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없다면 시험도 없고 실패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실패하여 넘어진 시험을 받는 자리에 오셨습니다. 

육신의 주림은 육신을 입은 인생에 큰 슬픔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신의 슬픔과 약함을 가장 괴로운 상황에서 같이 처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심한 주림 속에서 마귀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을 변하게 하여 육신의 고통을 해결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떡 문제가 중요하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떡 문제를 해결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배고픔을 겪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구원자가 되려면 배고픔이 없는 풍요한 세상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우리를 주려 죽게 하려고 인도하였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돌을 떡으로 만들어 떡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광야 30년 동안 만나를 내려 먹이신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이것이 무엇이냐 하며 40년 동안 먹고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떡이 없다고 원망할 대 하나님은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만나로 먹여 주셨습니다. 

이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비한 것으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사람이 떡이 전부가 아니고 최고가 아닙니다. 

떡만으로는 살아서는 안 됩니다. 

떡이 부족해서 떡을 채우는 것을 취우선으로 한다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늘에서 오는 특별한 양식이 필요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입에서 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참 양식이라고 요한복음은 말씀하셨습니다. 

정치인들은 먹고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마귀의 시험을 합니다. 

떡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의 양식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새마을 운동 노래 잘 살아보세 노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잘 살고 있는데 행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아무리 풍요롭고 떡이 많아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목표와 꿈이 없고 미래가 없습니다. 

말씀은 힘과 비전과 영원한 소망을 줍니다. 

떡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보니 어디에도 위로받을 것이 없다고 어떤 사람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와 기쁨과 행복과 생명의 원천입니다. 

말씀이 있으면 고난을 견딜 수 있습니다. 

고난은 믿음을 배우는 은혜의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이 있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먼저 말씀을 추구하고 순종하면 모든 필요한 것을 더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돈보다 떡보다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사람에게 떡을 주시고 옷과 집을 주십니다. 

풍요 속에서가 아닌 상황에서도 헌신하는 자유를 주십니다. 

고난 속에서도 말씀을 간직하고 영적인 풍요를 누리게 하십니다. 

마귀는 천하 만족을 주겠으니 절만 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마귀에게 절 한 번 하면 만국을 주관하는 권력을 준다고 하니 매력적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네가 주인이 돼라 내 마음대로 살아라 하면 권력의 욕망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내가 마음대로 내가 주인이 되어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절했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본성대로 내가 주인이 되어 주관하며 살면 행복할까요?

그러나 실제로 우상이, 정욕이, 권력의 욕망이 나를 지배하여 욕심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권력 욕망은 불안과 두려움을 심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 순종할 때 마음이 기쁘고 자유롭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면 얼굴이 굳어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면 아름다워집니다. 

인간이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 되는 것이 자유로움의 근원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이름이 거룩하게 되시고 나라가 임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도록 하는 기도제목을 가지고 순종할 때 마음이 자유롭고 밝고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되어 대화할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세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보호를 체험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맛사와 므리바에서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신가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그렇다면 우리를 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야지 왜 황폐한 곳으로 인도하시는가 의심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오아시스가 있는 꽃길로 인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가, 더 나아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은 맞나 합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시는 것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셔서 이런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셔서 이런 고난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힘들 때마다 이스라엘은 원망 불평과 의심 반역으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고 신실하셨습니다. 

마침내 아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완결판입니다. 

사랑의 완성입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의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천사나 죽음도 우리를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취소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죽음은 하나님의 결정적인 사랑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마귀를 이기신 사건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마귀의 시험에 넘어진 어떤 사람도 능히 구원하십니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능히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를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난 속에서 고난을 통과하는 영광의 자려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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