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죽어가는 백부장의 종을 말씀으로 낫게 하시고 죽은 청년을 말씀으로 살리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장 높고 강하고 큰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가장 크고 높은 분으로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가버나움에 들어갔을 때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백부장의 로마 군대의 꽃이라고 불렸습니다.
유대를 정복한 로마 군대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로마는 무력으로 식민지를 통치하였기에 백부장들이 거칠고 사납고 폭력적인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유대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 살려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당시 종은 재산 취급을 받았기에 종이 병들면 버립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유대인 장로들에게 부탁해서 예수님을 모셔달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 장로들도 예수님께 가서 청했습니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가 유대 민족을 사랑하였다고 하였고 그들의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백부장이 인품이 훌륭했습니다.
종을 사랑했고 식민지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힘이 있다고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이 많은데 그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을 위해 장로들의 간청을 들어주고자 했습니다.
유대 장로들이 뭔데 예수님께 백부장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는 것이 고자세이지만,
예수님은 백부장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병들고 약한 한 사람을 돕고 치유하시는 사역인데 백부장의 마음을 돕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자 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돕고자 하셨습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유대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을 구합니다.
쉰들러가 내 차를 팔았으면 10명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울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에게 반지를 주었는데 거기에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천하를 구하는 것이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에서 막내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희생됩니다.
왜 한 사람을 위해 이렇게까지 희생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습니다.
그러나 노인이 된 라이언이 가족들을 데리고 대위의 죽음 앞에서 울며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911 테러 때도 남은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애썼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독생자를 희생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입니다.
일대일로 한 사람을 섬길 때 목자는 많은 것을 희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백부장의 심경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집이 멀지 아니하며 벗들을 보내 말씀을 청합니다.
주니이 오실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오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중에 예수님이 누구실까 생각하다가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 크고 높은 권위를 가진 분이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오라 가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학생이 교수님에게 오라 마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한낱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을 오라고 한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높은 분인지를 깨닫자 예수님을 모실 수도 없고 설 수도 없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말씀만 하셔도 하인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하였습니다.
군대는 높고 낮음의 질서, 명령과 복종의 질서로 이뤄진 공동체입니다.
계급이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로마 군대가 승리하여 세계를 정복한 것은 군인 세계의 명령과 질서 속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명령과 복종의 체계가 없으면 로마 정복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이를 기초로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될 것이라는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높은 분, 사령관이심을 깨달았습니다.
명령만 하시면 죽어가는 하인이 낫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씀으로 사람들을 치유하시는 것을 볼 때 영적인 세계, 질병도 통제하시는 사령관이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놀라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엄청난 믿음, 위대한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런 믿음은 보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서 가장 크고 높은 분으로 여기고 어떤 문제보다도 예수님이 더 강하시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드는 미음입니다.
상황과 환경보다 더 큰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사람을 믿음으로 판단하시고 평가하십니다.
이만한 믿음, 요만한 믿음 등 다양한 믿음이 있습니다.
사람은 돈이 많은가, 집이 있나 뭐 이런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믿음으로 사람을 보시고 평가하십니다.
가나안 정복전쟁 때 정탐군 열 명은 가나안 족속을 거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거인 족속을 밥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크게 보면 문제는 작아집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크게 보는 것입니다.
문제가 아무리 심각해도 예수님이 한 말씀을 하시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믿음입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상황이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을 크게 보고 말씀을 붙들 수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말씀을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미음이 이만한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문제 앞에서도 예수님을 작게 보고 슬퍼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이스라엘을 보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이 이런 믿음을 가지니 놀라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기뻐하셨습니다.
하인이 이미 나았습니다.
상황이 빨리 나아지지 않으면 힘듭니다.
믿음을 지켜도 당장 좋아지지 않으니 믿음의 인내가 필요하고 영적 싸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동일한 것입니다.
상황이 당장 바뀌지 않아도 오래 인내하고 버티는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면 됩니다.
상황을 바꾸는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입니다.
상황이 어렵다고 낙심하고 믿음을 놓으면 하나님이 일하실 근거가 통로가 없어집니다.
믿음을 지키면 상황이 바뀌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주님이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상황이 힘들 때 이 말씀을 붙들고 믿음을 지켰다고 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상황이 힘들지만 말씀을 놓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나는 이만한 믿음이 있습니까?
요만한 미음이 있습니까?
나는 어떤 고난을 받고 어떤 말씀을 붙들고 있습니까?
내가 어떤 어려움 속에서 어떤 말씀을 붙들고 어떤 위로가 있는가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주님을 모든 문제보다도 크게 여기고 중하게 여기고 말씀을 붙들고 기대하는 사람이 주님을 위로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인 성으로 가실 때 많은 무리가 동행했습니다.
나인은 기쁨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들어가기도 전에 깊은 슬픔을 만납니다.
나인 성에 너무나도 큰 슬픔이 있었습니다.
슬픔에도 경중이 있는데 남편 없는 과부가 외아들을 잃어버린 슬픔은 인생의 가장 낮은 바닥일 것입니다.
여자는 남편도 없고 하나 남은 아들을 잃었으니 의지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상실감, 사람을 잃어버린 상실감보다 더 큰 고통이 없습니다.
전쟁으로 사라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하늘에 사무칩니다.
세월호 사건의 슬픔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죽음의 어두움이 지배하는 동안 상실의 슬픔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부를 보시고 예수님의 심장이 그 여인을 향해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인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원어에는 마음이 끊어지는 아픔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당하지 않은 슬픔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슬픔을 어떻게 아실까요?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가장 깊이 경험하셨습니다.
얘수님은 십자가에 아버지 하나님께 버림받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슬픔을 가장 잘 아십니다.
얘수님은 과부에게 울지 말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행렬 관을 멈추게 하시고 청년아 부르셨습니다.
관 속에 죽은 시체를 청년으로 부르셨습니다.
청년은 왕성하고 젊고 생명이 약동합니다.
봄에 푸른 싹들이 돋는 것과 같습니다.
청년이 가장 아름다운 때입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청년도 재가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죽은 청년을 향하여 청년아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죽은 자가 어떻게 말을 듣습니까?
죽은 자에게 아무리 말을 해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네게 말하노니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 죽은 자도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납니다.
하늘과 땅의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듣고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앞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그를 청년이라고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죽은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살려 일어나 앉히니까 그가 다시 말을 하였습니다.
청년은 일어나 말하는 사람입니다.
말이 많다고 청년은 아닙니다.
믿음, 감사, 찬양, 위로의 말을 하는 사람이 청년입니다.
원망, 불평, 사나운 말, 짜증의 말을 하는 사람은 관 속에 누운 자입니다.
비난과 원망의 말은 무덤의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감사와 사랑의 말은 꽃밭과 같습니다.
백부장은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하는 청년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말하고 인사하고 물어주면 그런 사람은 청년 같습니다.
성경 공부할 때도 반응하고 물어보고 관심을 가져주면 청년입니다.
관심도 없고 차갑고 냉랭하면 죽은 자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청년을 일어나게 해서 말하게 한 것이 중요합니다.
말 못 하게 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넣어주어 말을 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어두운 말, 죽은 말을 하다가 감사와 사랑의 말을 하다니 이것이 부활의 역사입니다.
아름다운 봄에 꽃이 만발해도 감사와 감격이 없고 어둡고 차가운 사람은 청년이 아닙니다.
감사와 감동이 있고 사람에게 다가와 안부를 물어주고 격려하는 사람이 청년입니다.
나이가 청년이라도 꿈도 없고 소망이 없으면 청년이 아닙니다.
청년은 인생의 태도라고 하였습니다.
경이로움에 대한 호기심, 인생의 게임에 대한 즐거움 등이 청년이라고 하였습니다.
냉소주의, 비관주의로 사로잡히면 청년이 아닙니다.
어떻게 청년의 삶을 살아갑니까?
내 뜻으로 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예수님이 말씀을 주셔야 꿈과 열정의 청년이 됩니다.
방지일 목사님은 100세가 넘어 돌아가실 때까지 말씀을 전하셔서 영원한 청년으로 남으셨습니다.
20대 청년이라도 말씀에 반응이 없고 꿈도 없고 좌절하면 청년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청년이시고 부활하셔서 죽음을 이기시고 내 안에 생명을 주시면 우리가 청년이 되어 위로와 사랑의 말을 하는 청년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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