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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나에게 읽어주다

2022년 10월 23일 잃은 아들 찾은 아버지의 기쁨

by 로카리스 LORD Charis 202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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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은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면 충격이 크고 다시 찾을 때까지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다시 찾기까지 물불을 가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다시 죄인을 찾으시면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하십니다.

 

사건의 말단은 바리새인과도 식사를 같이 하신 것입니다. 

분위기가 따뜻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뿐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과도 식사를 하셨습니다. 

세리는 매국노이고, 공식적인 죄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세리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식사는 같이 할 수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식사를 하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바리새인들에게는 가까이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환영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아주 불편했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밥을 같이 먹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통해 왜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식사를 하시는지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그러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를 찾기까지 찾습니다. 

양은 목자를 떠나서는 스스로 살 수 없습니다. 

독수리가 채가기도 하고 여유와 늑대에게 잡아먹히기도 하고 독초를 먹기도 하고 구정물을 마시다가 탈이 나기도 합니다. 

목자에게는 양 한 마리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찾기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양을 찾으면 야단을 쳐서 목에 밧줄을 묶고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무등을 태워서 어깨에 메고 벗과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합니다. 

잃은 양을 찾은 기쁨이 너무 커서 잔치 비용이 많이 들어도 손해나 희생을 아까와하지 않습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었습니다. 

단순한 돈이 아니라 열 개를 한 줄로 연결해서 머리 장식으로 사용한 결혼 기념품입니다. 

소중한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개가 사라졌습니다. 

남은 아홉 드라크마로 만족하지 않고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샅샅이 쓸며 끝까지 찾습니다.

열 드라크마 중에 한 개도 잃어서는 안 되는 기념품입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더 기뻐합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고 식사하시는 이유는 죄인이 하나님 보실 때 잃어버리면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절박함으로 한 영혼을 찾고 계시고 그 한 사람을 찾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예수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죄인은 찾아야 하는 잃어버리는 하나님의 귀중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찾으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귀한 사람으로 영접하셨습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잃어버린 소유를 다시 찾는 것입니다.

너무나 기뻐하셔서 이웃과 벗을 초청하시고 천국의 천사들을 불러서 잔치를 벌이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죄인을 배척했습니다. 

귀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고 식사 교제는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죄인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움도 모르고 죄인 한 사람을 찾으시는 그 마음을 모릅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하나 마음이 황폐합니다. 

하나님의 슬픔도 기쁨도 없습니다. 

이기적인 세리와 식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단한 수고입니다. 

이런 섬김 속에 하나님의 아픔을 체험하고 기쁨에 동참할 때 우리 마음이 따뜻해지고 우리 마음에 천국이 있습니다. 

 

셋째 비유는 유명한 탕자 이야기입니다. 

메인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어느날 둘째가 아버지에게 살아계신데도 불구하고 유산을 요구했습니다. 

미리 요구하는 것은 독림심이 강해서입니까?

아버지 마음에 상처를 주는 무례한 행동입니다. 

아버지는 큰 상처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의 뜻을 아버지의 권위로 꺾지 않고 유산을 주셨습니다.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셨고 스스로 돌이킬 것을 기다리고 믿어주었습니다. 

며칠이 안 되어 둘째가 재산을 모아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먼 나라는 아버지의 통제와 간섭이 없는 나라였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얼마든지 행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며 시간과 돈을 절제하지 못하고 인생을 가치 있는 일에 투자하지 못했습니다. 

술과 정욕과 쾌락과 연대로 소중한 삶을 낭비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다 허비하고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비로소 그가 궁핍해졌습니다.

비로소 그가 궁핍을 알게 되었고 먹고 살기 위해 알바를 구했습니다. 

결국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 집에 들어가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형편이 비참하게 되었는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해도 그것도 부족했습니다. 

돼지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비참한 그의 모습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 돼지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한 실존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노력해서 성공하고 가치있게 살고자 뜻은 있지만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인생이 나락에 떨어진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 많이 벌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삶을 들여다보면 부끄러운 정욕에 이끌려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 인생도 초라합니다. 

그의 실패의 원인은 그가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은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 없이 불신 가운데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이 철저하게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실패가 비참한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축복의 기회가 됩니다. 

그는 비참한 상황에서 아버지의 풍족함을 기억했습니다. 

아버지의 풍족함은 은혜의 풍족함, 사랑의 풍족함입니다. 

먼 나라에서 세상 주인들이 얼마나 무정하고 무자비한가를 알았을 것입니다.

먼 나라 돼지치기 해보니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삭막하고 아버지가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가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비참한 모습이 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았습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아버지께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절망이 크면 삶을 포기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용기가 아닙니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이 용기입니다.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께 돌아가고자 자존심도 버리고 돌아가는 것이 용기입니다. 

품꾼의 하나라도 받아달라고 은혜를 구하고자 했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하였습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돌이키는 것은 자존심과 체면을 버리는 위대한 용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원망과 불평으로 누워있다가 하늘의 별을 세어보라 내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받아들였고 원망과 불평 제면과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갔을 때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돌이킬 때 있는 것입니다. 

자존심과 체면과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돌아가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안 돌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어서 달리는 기차에 뛰어드는 삶도 있습니다. 

돌아갈 곳이 있고 기다리는 목자가 있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다리는 목자가 있고 자기를 영접해주고 따뜻하게 맞아주니 얼마나 기쁩니까!

하나님은 언제 돌아가도 항상 변함없는 사랑으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독생자를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품은 언제나 따뜻하고 변함이 없습니다. 

세 번째 비유는 잃은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기쁨이 나타나 있습니다.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 달려가는 모습은 아버지의 기다림이 매우 적극적인 행동임을 말해줍니다. 

날마다 아들을 애타게 찾으며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아들이 멀리서 뼈만 남은 몰골이 되어 돌아오는 데도 아버지가 먼저 알아보고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긍휼과 사랑이 불타올라서 버선발로 뛰어나가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아들이 돌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버지의 사랑과 수고의 열매였습니다. 

아버지에게 큰 상처를 주고 떠난 아들이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주지 않고 오직 끌어안아주었습니다. 

뜨거운 포옹으로 맞아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다 덮고 완전히 망가져서 돌아오는 아들을 사랑으로 상처를 덮고 안아주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아버지의 아들이라 감당하지 못한다고 아들은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로서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성대한 환영잔치를 벌였습니다. 

누가 보면 고시 패스하고 금메달을 딴 것 같아 보입니다. 

죄를 뉘우치고 돌아온 것은 금메달 딴 것보다 더 위대한 일입니다. 

회개한 아들은 하나님의 큰 기쁨과 행복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은 초상집처럼 슬픕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도 슬픕니다. 

날마다 회개하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하나님과 우리가 기쁨의 잔치집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아들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창녀와 탕진해서 돌아온 아들을 금메달 딴 것처럼 영접하니 도저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말씀합니다. 

얘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느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첫째를 집 안의 탕자라 합니다. 

열심히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데 아버지의 풍요함을 전혀 함께 누리지 못합니다. 

얼마든지 친구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할 수도 있는데 잔치를 누리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둘째 아들 때문에 슬픈지 또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함께 슬퍼하고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일만 하는 첫째를 보시면서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풍요 속에서 잔치의 기쁨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슬픔도 나눠갖고 기쁨도 나눠갖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슬퍼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세리와 죄인을 섬기는 예수님을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 고난에 같이 동참할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귀히 여기고 함께 섬기고자 한다면 얼마나 예수님이 행복하시고 위로를 받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옆에서 비난하고 정죄하니 예수님의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섬기고 고생하는데 자녀가 허랑방탕하게 살고 서로 싸웁니다.

그러면 부모의 마음이 슬픕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독생자를 보내셨는데 옆에서 비난하고 정죄하면 마음이 아프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식을 버리지 않으시고 심통 부리는 첫째를 다독여 잔치에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서 비난과 정죄 속에 사는 것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 중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목자가 있을 것을 믿고 희망하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켜 자기 의를 쌓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이 식지 않으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날 때 그 불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의 마음에 붙으면 영원히 꺼지지 않음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입니다. 

십자가에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가 뜨겁게 지금도 흐릅니다. 

인간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녹여내고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불바다였습니다. 

에스겔에서도 하나님의 보좌가 불타고 있었습니다. 

망한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은 무엇을 했나 안 했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슬픔과 아픔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한 사람의 아픔에 관심을 갖고 돕는 사랑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사람은 생수의 통로가 됩니다. 

어디를 가든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고 어디를 가든지 손 내밀어 도와줄 수 있는 목자가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섬기는 좋은 목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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