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예수님이 세리 레위를 부르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에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공동체가 낙인을 찍은 죄인을 제자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오셨고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세리는 세금 공무원입니다.
당시 세리는 동족들에게 돈을 걷어서 로마인들에게 바쳤고 정한 세 외에 더 걷어서 자기를 배 불린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를 공적인 반역자로 여겼고 회당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레위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눈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바라보셨습니다.
긍휼과 사랑의 눈빛이었습니다.
아마 세리 레위를 보고도 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악인으로 여겨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가 걸어온 길을 보셨고 그의 영혼의 아픔을 아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초청하셨습니다.
아무도 그를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도 버리고 동족도 버린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였습니다.
이웃의 슬픔과 아픔에는 철저히 무관심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멀리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아무도 그를 부르지 않았고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세관에 앉은 그를 예수님이 바라보셨고 부르셨습니다.
아무도 그를 하나님의 형상의 인격을 가진 영혼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시고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하시며 그를 부르셨습니다.
사람은 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중요합니다.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대부분 인간의 본성적 목표입니다.
돈을 따르라 육신의 편안함을 따르라 쾌락을 따르라 이런 인생의 방향을 갖고 살아갑니다.
레위는 돈을 위해 율법도 버리고 친구도 버리고 고귀한 삶의 방향도 버렸습니다.
그는 행복하지 않았고 외로웠고 공허했습니다.
돈이 생명을 주지 못했고 안락한 삶이 영혼의 공허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것은 예수님을 얻기 위한 방향으로 전환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주셨고 문둥병자에게 깨끗함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내주어 만민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삶이 아름다워지고 깨끗해지고 밝고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사람은 예수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돈을 따르면 돈독이 오릅니다.
정욕을 따르면 영혼이 더러워지고 불결해집니다.
사람의 인정을 따르면 늘 목이 마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예수님을 닮은 사랑과 은혜의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예수님을 가지면 줄 것이 많은 믿음 부자, 사랑 부자가 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말씀이시며 십자가에 생명을 주신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사명인이 되라는 말씀이십니다.
보통 제자 곧 후계자를 택할 때 성품이 좋고 사회성이 좋은 사람을 뽑습니다.
실력이 없고 인격이 부족하고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을 뽑으면 후회합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 힘든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너무 이기적이고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뭔가 실수로 잘못 부르신 것이 아닌가요?
예수님의 부르심은 오직 예수님의 의지에 있습니다.
무슨 자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습니다.
취소도 없습니다.
이 정도일 줄 몰랐다 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소망 없는 사람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시는 것이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입니다.
강력한 하나님의 소망이 하늘에 축복된 선물입니다.
강력한 부르심에 레위의 반응도 강력합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은 그의 간절한 열망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부르심 안에서 사랑과 소망이 강하게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가 좇았던 돈과 성공이 자신을 비참하게 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에 미련과 애착이 있다면 다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일단 따르고 천천히 버려야 하지 않나 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전부 아니면 전무...
전부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거나 전무 버리지 않고 예수님을 안 따르거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전부 다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무엇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면 그것은 고귀한 희생입니다.
예수님의 가치를 안다면 버리지 말라고 해도 버립니다.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보화로 얻은 후 기쁨이 충만해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는데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과거에는 동료 세리들을 보면 긴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니 많은 사람들과 밥을 먹으며 행복해졌습니다.
이때 함께 기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찌 예수님이 세리와 함께 밥을 먹는가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라야 쓸데 있다 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나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불신과 원망 불평의 죄를 심판하셨지만 동시에 언약을 수없이 배반하는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셨고 함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람을 죄에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끊어내야 할 존재로 보지 않으시고 치료하고 건강하게 회복해야 할 병자로 보십니다.
우리는 다 죄로 병든 사람입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성경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이라면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회개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회개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도록 도와주러 오셨습니다.
어떻게 회개합니까?
야단쳐셔?
따뜻한 사랑으로 부르시고 함께하며 같이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무섭게 해서 회개할 수 없습니다.
교만하고 완악한 사람과 이론과 지식으로 싸워서 회개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속죄 제물로 주신 하나님의 마음 아픈 사랑, 죄인을 인해 고통당하신 그 아픈 마음으로 사람을 오래 사랑하고 섬기는 것만이 회개하도록 돕습니다.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과 함께하며 그 사랑을 알기까지 돕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예수님은 그런 사람과 함께하며 밥 먹어주시고 대화하며 자기를 한없이 낮추시고 한없이 속이 썩으십니다.
은혜를 당연시 여기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내가 회개했다면 내가 착하고 똑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구나를 깨달으면 그때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때 마음에 기쁨이 흘러 들어옵니다.
회개하지 않는 영혼을 기다리는 목자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회개하기까지 10년, 40년 혹은 평생 어쩌면 회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목자가 감당하는 사랑의 짐은 양의 장례식장에서 끝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시기 위해 우리가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목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슬픔 가득한 사랑을 해야만 우리가 성화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섬길 때 그의 병든 모습을 알아갈 때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고통을 알아가는 선물입니다.
사람을 섬기며 아픔을 겪을 때 하나님이 나 때문에 얼마나 슬프셨는가 깨닫게 됩니다.
죄인과 함께하기 위해 이 고난을 감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감사합니다.
요한의 제자는 금식하고 기도하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금식과 기도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원래 금식과 기도의 전통은 바벨론 포로 시기에 하나님께 슬픔을 표현하고 기도하면서 회복을 부르짖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돌아온 후에 유대인들은 계속 금식해야 하냐고 묻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지금까지 나를 위해 한 것이냐 너희 자신을 위해 한 것 아니냐 하셨습니다.
금식은 회복이 되었다면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잔치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은 먹고 마시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기뻐하고 잔치를 해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내가 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셨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새 옷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습니다.
낡은 옷을 기우기 위해 새 옷을 잘라서 붙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은 사람은 없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으면 부대가 터집니다.
새 옷과 새 포도주는 언약의 성취입니다.
언약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입니다.
낡은 옷과 포도주는 금식과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재림하시니 모든 것을 바치라 합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이 재림하시니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돌아가라 합니다.
전통이 그리스도가 목적이 아닌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되면 안 됩니다.
성취자가 오셨으니 새 옷을 입고 새 부대가 되어 담아야 합니다.
아파트 분양을 받았다면 모델하우스를 갈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으니 예수님을 소개한 옛 전통을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천국 생활을 누려야 합니다.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
그리스도가 새 옷입니다.
새 포도주는 향긋하고 알딸딸합니다.
성령의 포도주를 마시면 고난이 괴롭지 않습니다. 술 취하면 때려도 안 아픈 것처럼.
예수님의 옷을 입고 성령의 포도주를 마시면 행복한 삶입니다.
양을 섬기는 고난을 통해 예수님을 배우는 삶은 천국입니다.
한 사람을 섬기는 삶이 정말 행복합니다.
일대일 성경공부는 천국입니다.
세상 어디에서 나를 사랑으로 받아주고 나를 환영해주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을 주고 말씀을 주는 목자를 만나겠습니까!
목자를 만난 양은 얼마나 복 받은 자입니까!
말씀을 전하는 목자,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여 주는 목자가 있는 양의 삶은 행복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의 복을 전하는 나의 삶은 가장 행복합니다.
이 복을 전해주도록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내주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항상 새 옷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포도주를 허락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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