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책임자를 뽑을 때 겉옷을 벗고 상처를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처가 많은 사람이 공동 우리의 책임 목자로 뽑힙니다.
양을 위해서 맹수와 싸운 상처가 양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는데
하나님도 사람을 사랑하시느라 상처를 많이 받으셨습니다.
사랑은 아픈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아픈 사랑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평지에 서셨는데 제자의 많은 무리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습니다.
온 무리가 예수님을 만지려고 하였습니다.
능력이 예수님께로부터 나와 모든 사람을 낫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특별한 은사가 아닙니다.
한 손 마른 사람처럼 약하고 병든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는 사랑입니다.
모두가 그를 외면했습니다.
구석으로 가 있으라 했습니다.
그의 인격과 슬픔에 관심이 없었고 단지 이용할 대상과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셨고 내 손을 내밀라 하심으로 그의 메마른 인생을 회복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은 죄와 허물을 덮고 병을 치유하는 능력입니다.
오늘날도 사방에 병든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줄 목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으로 치유하셨고 그런 일을 할 사람을 지도자로 키우셨습니다.
한 사람을 말씀으로 돕고 회복하고 치유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20절부터 산상수훈이 나옵니다.
제일 먼저 4복 4화를 가르쳐 주십니다.
복 있는 자 4 부류, 화 있는 자 4 부류를 말씀하십니다.
지금 가난한 자, 배고픈 자, 우는 자, 인자로 말미암아 미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런 고난은 불행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하시는 이유는 그런 고난이 예수님을 따르며 겪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가난에 동참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부요한 분이신데 스스로 가난한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함이십니다.
배고픔과 슬픔과 외면과 거절과 미움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이유가 아니라면 가난과 슬픔과 미움을 뭣하러 받겠습니까?
그냥 피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위해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과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복입니다.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죽은 후에가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만족과 기쁨을 맛보며 산다는 의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베드로는 말씀했습니다.
고난은 천국의 티켓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천국 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고난으로 소통하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 마음에 내려옵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평강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따뜻해집니다.
육신의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해 예수님과 함께하면 영혼이 밝아지고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도 불안이 사라집니다.
가장 큰 특징은 감사가 많아집니다.
하나님 나라가 있는가 없는가 단적인 조건은 감사입니다.
감사가 없고 불만이 많고 원망이 많으면 하나님 나라가 없는 것입니다.
힘든 가운데서도 감사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를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을 때 기뻐하라 뛰놀라 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이 그런 고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이 고난 속에도 그리스도의 위로와 평강을 얻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 믿고 잘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부요가 전부가 아니고 그의 고난에 동참해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고난에 들어가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축복과 성공과 명예는 세상 가치관으로 보면 즐거워 보이나 영혼이 위로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칭찬을 받으면 좋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이 그런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칭찬은 진정한 영광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인격과 형상이 새겨지고 진정한 칭찬에 합당한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며 받는 고난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고난입니다.
원수가 없거나 멀리 있는 것 같지만, 내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원수입니다.
나에게 무관심하고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함부로 여기는 사람이 원수입니다.
이런 사람을 사랑하고 선대하고 축복하고 기도해주라니
그런 사람을 사랑하는 아픔을 감당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냥 외면하고 신경 쓰지 않고 사는 것이 편안합니다.
미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겠다고 합니다.
내가 왜 저런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아픔을 당해야 됩니까!
나를 저주하고 모욕하는 사람에게 저주와 모욕으로 맞대응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를 원수처럼 대접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언약을 수없이 배반하는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화목 제물로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느라 마음에 고통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라 하십니까?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픔을 체험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때문에 근심했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사람을 사랑하느라 고통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이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할 때 하나님과 가까워집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아낌없이 다 주셨습니다.
악을 선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죄인들을 얻으시고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믿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싸우고 뺏는 것이 아니라 져주고 믿어주고 참고 손해보고 희생하는 것이 사람을 얻는 길입니다.
져주는 것이 곧 이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얻는 길입니다.
져주고 믿어주고 속아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양이 목자를 이기면 신나잖아요.
목자가 빈틈이 없으면 양이 오지 않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하십니다.
내가 삶의 중심이 되지 말고 남이 나의 삶의 중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커지고 성장하면 이것이 가능합니다.
어머니의 마음에는 자기보다 자녀가 더 중심이 됩니다.
암에 걸린 어머니가 아들에게 밥은 먹었니라고 물어보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중병보다도 자식이 배고프지 않나 걱정하는 것입니다.
남을 더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그러면 자기중심과 욕심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그때 성장합니다.
남을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도 대접받고 싶으십니다.
하나님도 사랑받고 싶어 하시고 위로받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 달라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하나님을 위로해드리고 사랑해드리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중에 가장 슬픔이 많은 분이시고, 예수님이 재림과 부활을 가장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내가 내 삶의 중심이 되면 내가 슬프고 내가 괴롭고 모든 것이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내 중심이 하나님께로 중심축이 옮겨져서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을 생각하면 신기한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돌아볼 신기한 힘이 생깁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까지도 사랑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저런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한다면 사랑의 기적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사람이 가능합니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도 그렇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사랑에서 머물면 안 되고 하나님의 수준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전공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에게 은혜를 거두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감사가 없고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은혜를 모르는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외롭지만 끝까지 가나안 땅에 데려가셨습니다.
여러 번 전멸당할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그들이 언약 백성으로 살아남았습니다.
부모로서 대들고 생각이 굳어진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한 대가로 달라지지 않으면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헛수고한 것이 아닌가 실망이 듭니다.
다 이기적이라 사람은 남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안 믿으셨다면 버리고 떠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 같은 사람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사람을 다시 사랑할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도리어 사랑의 한계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실망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바라보면 끝까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죄성에 부딪칠 때 고통을 겪는데 그 고통이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 고통을 받아들일 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아픔을 감당하다가 부모다워지고 목자다워집니다.
신앙의 목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가 나의 인격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섬기며 아픔을 당할수록 내면이 변화됩니다.
힘든 사람을 섬기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간직하도록 하시는 의미입니다.
책 100권을 읽는 것보다 한 사람을 섬기면 성장합니다.
사람을 섬기면 그 고통을 통과하면서 마음이 변화됩니다.
사랑은 육신의 것이 아니라 영혼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갈 때 사랑을 가지고 갑니다.
사랑은 영혼의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픔을 감당하면서 사람을 사랑해서 사랑의 재산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타인을 향한 태도가 곧 나에게 돌아옵니다.
누군가 비판하고 정죄하면 고맙게 받아들이기보다 더 상대방을 낱낱이 파헤칩니다.
누군가 허물을 덮어주면 나도 덮어줄 것입니다.
비판과 정죄를 주면 넘치게 돌아오고 용서를 주면 또 넘치게 돌아옵니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자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죄의식 가운데 살아갑니다.
용서와 사랑은 사람을 절망의 구덩이에서 건져줍니다.
좋은 지도자는 자기 문제를 돌아보고 배우고 고치는 사람입니다.
눈에 티가 들어가 고통할 때 누군가 빼주면 시원합니다.
그런데 빼주겠다고 온 사람의 눈에 들보가 있다면 그는 보이는 것이 없고 개념이 없는 사람입니다.
눈을 뺄 사람입니다.
율법주의는 들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고 남의 문제도 모르는 들보가 가로막힌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배워야 들보가 빠지고 자기 문제가 보이고 남을 용서와 사랑으로 도와주는 좋은 목자가 됩니다.
이런 사람이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주초를 반석 위에 놓는 사람입니다.
기초가 튼튼해서 요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시련의 홍수와 탁류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기초가 없는 사람입니다.
홍수가 나고 탁류가 부딪치면 파괴됩니다.
신앙은 말이 아니고 삶, 능력과 사랑과 행함에 있습니다.
말이 거창해도 고난에 견딜 인격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아픔을 감당할 능력, 사람을 섬기며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배우는 것이 흔들리지 않는 인생의 기초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의 고난에 동참하면 사람은 반드시 변합니다.
인격이 아름답게 성장합니다.
추하고 흉한 사람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면 향기 있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 믿는 삶은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고난에 동참하지 않으면 말만 많은 위선자가 됩니다.
말만 많은 사람은 교회에 슬픔을 줍니다.
본인도 성장이 없고 교회는 근심합니다.
성장해야 희망이 있습니다.
한 사람을 섬기는 고난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을 섬기는 고난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교만으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사랑의 능력으로 병든 영혼을 치유하며 교회와 세상에 희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소통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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